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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hemeral Landscape 1

자연과의 미메시스적 화해를 위한 임시 풍경에로의 초대

_갤러리 마리 차경림 아트디렉터

자연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다.

인간의 역사 이전에 신화의 시대가 있었다. 고대인들의 신화에는 천지의 생성부터 하늘과 땅 사이의 각 부분을 관장하는 올림푸스 12신이 있 었고, 그들의 자손인 인류의 기원이 있었다. 신들이 주관하던 자연은 하나하나의 개별적 사물들이 모여 있는 세계가 아니라 “뒤엉킨 자연 전 체”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알려지지 않은 것, 낯선 것들이 원초적으로 미분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경험계를 초월하는 것이고, 사물의 이 미알려진속성외에사물속에있는그이상의무엇으로서정령이들어있으며,인간은이러한 미지의것,낯선것으로다가오는뒤엉킨자연 전체에 대해 항상 불안과 공포심을 느낀다고 아도르노는 그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올림푸스 신들의 자손들은 신을 조상이나 부모로 두었지만 신들과는 달리 타나토스(죽음)의 운명을 가진 나약한 존재로서 죽음과 공포로 부 터 비롯되는 자신의 운명을 해쳐가야 했다. 인간이 신과 주술적 소통이 가능하던 시대, 신과 동격인 자연은 신비롭고 마법과 같은 불가사의한 힘과 아름다움이 있었으나 인간에게는 위협과 공포와 금기의 요소가 많았다. 그리하여 신화 속 영웅들은 기지를 발휘해 사이렌 요정의 유혹을 물리치고 난파되지 않으며, 식인 거인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기 보전(self-preservation)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영역 즉 문명을 개척해야 했다. 그렇게 신과 그들의 권역인 자연으로부터 탈출하였고 신화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태학적 야생 공간인 숲은 공포의 대상인 한편 인간이 범접할 수 없기에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미지이다."
- 홍일화 작가 노트 중에서 –

우리는 이제 일체의 구분선 없던 자연을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의 내적 표상으로 재단한다. 재단할 수 없는 것들이 다가오는 순간 공포를 느낀다. 홍일화의 『임시 풍경』 중에서 숲과 강 한 가운데 자리한 핑크색 더미 이미지의 작품들을 보면 작품 속 핑크 더미는 딸기 우유같이 스며 드는 달달한 낯섬이 아니다. 또한 자연물이 의인화되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의 생경(生硬)이 만들어낸 신비가 비치는 한편 왠지 기이하고 불편 하고 불안정하며 공포스럽다. 마치 요정, 나무, 바위, 절벽, 꽃들이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상으로 가득했던 영화 『말레피센트』의 정령들이 모여 사는 인간 사회와 단절된 무어 숲처럼 말이다. 홍일화는 제주 곶자왈 숲에서의 야생이 깨어나던 밤의 경험을 이렇게 풀고 있는 듯하다. 있는 그대로의 신화적 자연을 탈출하여 얻은 문명의 대가는 보편이 아닌 것 , 인위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것, 그것들은 개념화 되지 않는 카 오스 같고 마치 깜깜한 밤 숲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알 수 없는 공포와 신비를 모두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지배하다

한편으로 자연에 적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연을 기만하여 위기로부터 탈출한 인간의 이성적 간계는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근대계몽이라는 대기획을 통해 신화시대의 이성적 간계를 이용하여 자연으로부터 탈출하는 전략을 넘어서서 자연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계몽주의 철학과 과 학의 발달이 궤를 같이 하여, 자연의 신비를 벗기는 일에 몰두하였다. 자연은 이제 더 이상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가 아니며,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폐기되었고, 신성이 거세된 자연은 단지 인간을 위한 사물이 되었다. 개념화에 의해 불명 료한 자연의 낱낱의 요소들이 가지는 무질서 하고 다의적이고 낯선 것들의 의미를 통일시키고, 특수하고 질적인 차이를 은폐하며 인간을 구성 하는 토대로서의 자연을 망각하게 되었다. 자연은 이제 질적 요소들을 박탈당한 채 죽은 시체와도 같은 존재로 전락하였다.

"사회가 정한 다수의 코드에 따라가지 않으면 마치 불법행위를 한 것 인양 살벌한 주위의 시선에 난도질 당하는 느낌마저 든다."
- 홍일화 작가노트 중에서 –

홍일화의 『임시 풍경』 시리즈 작품들 중에는 핑크색의 알 수 없는 형상의 더미 외에 숲, 강물, 바다, 파도, 대지 등이 천연덕스러운 핑크로 대치 된다. 엷게 비치는 핑크가 아니라 진득한 분홍 고무가 녹아내린 듯한 핑크가 주는 쇼크에 잠시 머물다 보면 계몽은 단지 신화의 자연을 벗어 나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과 그것을 통해 지배를 추구하는 또 다른 신화로 전락해가는 과정이라는 아도르노의 지적이 떠오른다. 사회적 보편성은 비동일적인 특수자를 억압한다. 동일성은 그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여 비동일성(non-identity), 타자성 (otherness)을 제거하려하며, 그럼으로써 계몽으로서의 동일성은 스스로 문명임을 포기하고 나치즘과 같은 야만을 생성하는 것이다.

자연 세계 내에 이미 존재 했었음에도 문명이라는 렌즈에 가려 식별되지 않았거나 혹은 사회적 · 시대적 보편에 따라 성(性)정체 코드와 맞물 렸던 핑크를 주저없이 숲과 바다에 펼쳐낸 『임시 풍경』은 그러한 문명의 억압과 지배와 사회적 야만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홍 일화의풍경이 『임시풍경』인것은이러한절대와보편과그리고개념에의한통일화와동일성에반기를들며나아가지금여기서내가대상 에 대해 비동일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하고 표상한 것 역시 개별적이고 불완전한 것임을 드러낸다. 개념이 파악한 동일성은 그저 가상(illusion) 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 대상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근원적 오류에 대항하며 어떤 확정성도 남겨 놓지 않으려는 해방의 가능성 모색이다.

자연과 미메시스적으로 화해하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 보전을 위해서 사실상 반자연적 질서를 추구함으로써 그 이전의 신화를 해체하고 자연을 지배하여 얻은 것은 인간 자신 에 대한 지배와, 자기 억압 상태로의 회귀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연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자연을 지배하지도 않으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 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 질문을 던지자니 영화 『숲 속으로』 에서 각각의 동화 주인공들이 던지던 대사가 떠오른다.

... 정말 좋은 늑대 같았어요. 늑대가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여 주었어요. 숲에서는 누구나 어리석을 수 있지. 옮음도 그름도 숲에서는 무의미하지. 옳지 않은 일과 옳은 일 무엇이 진실인지 누가 알까? 해야 할 일과 맞서야 할 일, 스스로 결정해. 마녀가 옳을 지 몰라. 거 인이 선할지 몰라.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결정해. 숲에 다녀오면 숲과 마을 그 중간 어디에 살기를 꿈꾸지...

숲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곳곳에 인간의 보전에 위해(危害) 되는 것들이 있고, 오래 머물다 보면 목가적 상황 역시 환각의 행복에 불과하 여 무미건조한 무위도식이고, 동물의 삶처럼 결핍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주술적 태도로 자연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간계를 이용하여 자연으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이 개념적 동일화에 의해 신을 떠나 자연을 지배하기 이 전의 그 중간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이 꿈꾸는 숲과 마을의 바로 그 중간에 대하여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적 화해(mimetic reconciliation)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미메시스 란 예술 철학에서 “객체의 모방"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아도르노는 미메시스를 “객체와의 친근화”로 정의한다. 미메시스는 자신이 타자 로 인식될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상에 친근하게 접근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화적 세계에는 이러한 미메시스적 계기들이 깃들어 있 었다. 예를 들어 마귀들을 놀라게 하거나 달래기 위해 주술사는 마귀와 유사해지려 한다. 즉, 주술의 단계에서 주술사는 자연이나 신을 부정 하고 지배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횡포를 무마하기 위해 그것들과 가까이하여 유사해지려 한다. 여기에 바로 미메시스적 태도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단지 자연과 유사해짐으로써 자연을 달래고 자연과 화해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계몽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미메시스적 계기 들은 축출되고 본능적인 미메시스는 주술이 목적지향적인 것으로 전화되면서 의식적으로 숙달된 도구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방법 외에 어떤 방법으로 본래의 미메시스를 되찾을수 있을까?

아도르노는 계몽의 과정에서 축출된 미메시스적 계기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주체인 예술의 심미적(aesthetic)차원에서 다시 복원된다고 본다. 예술작품은 속에서의 미메시스는 대상을 단순히 “모방하는(imitate)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것에 친근시키는(assimilate)것”이다. 예술 작품은 단지 현실로부터 도피한 가상(illusion)의 세계이거나 혹은 현실에 대한 무반성적 반영(reflection)의 결과가 아니다. 예술은 현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그 연관성의 핵심은 예술이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지점이 되어 현실의 요소들을 재배치하고 현실의 지배적 관계 들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있다. 화가의 그림은 재현(represent)하기 보다는 그린다(paint).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억압 적인 동일화의 강제에 대항하는 투쟁 가운데 비동일적인(non-identical)것을 도와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일화의 전작들인 『스키마』 시리즈는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 장신구로 치장한 여성이 마치 패션화보처럼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묘사되었 다. 그러나 이내 그녀들의 장신구는 자연의 일부로 도식화된 패턴으로 감싸져 있으며 메이크업은 보호색과 경고색처럼 분장되어 있음을 발 견하게 된다. 주제부와 배경부의 경계가 모호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인 초상이다. 그의 또 다른 연작 『인터레이스』 에서 여인들은 꽃 과 풀과 물고기, 동물 등 자연물과 엮어 짜여진 듯한 모습이다. 보그와 코스모폴리탄의 동시대 커버걸과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그의 붓끝에서 인터레이스 된 것 같다. 인간 안에 내재된 미지에 대한 숭상과 생명의 모태가 되는 여성을 향한 경외라고 홍일화는 말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신화시대에서처럼 신과 주술적으로 소통하고,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힘이 있는 자연과 유사해지려는 미메시스적 의식의 표현 인 것이다. 바로크의 화려함을 차용한 자연물 낱낱의 장식은 비틀어진 변형으로 강조점을 살리는 극적 효과를 주며, 그로데스크한 느낌으 로 알레고리를 읽게 한다. 또한 『임시 풍경』에서의 초현실적으로 표현된 자연 대상물 역시 엠블럼화된(emblemized) 낯선 형과 색으로 시선 을 잡고, 심리적 불편감을 주지만 이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연의 동일화에 대한 거부이자 홍일화가 재배치한 자연에의 친근화 (assimilation)이자 미메시스적 화해이다.

한편 감상자가 예술작품에 미메시스적으로 접근할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나 자신이 없어지거나 혹은 나 자신을 작품에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객체의 우선성에 입각하여 예술작품이나 자연에 접근할 때, 타자와 나와의 불일치로서의 자신의 한계나 유한성을 자 각하는 전율(shudder)을 체험하게 된다. 전율은 자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전율 속 에서 우리는 자연미(natural beauty)를 느낀다. 단순히 자연도 아니고, 개별적인 자연적 아름다움도 아니며, 자연미 그 자체인 것이다. 자연미 에 대한 체험 속에서 “화해”의 계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신과 타자와의 통일이나 조화를 위해 자아나 타자를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 를 통해 각자의 존재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대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상대에 전율하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홍일화가 심미화시키고 재배열한 풍경과 초상에는 자연과의 화해 통로가 있다. 우리 스스로 등지고 차별해온 온전히 늘 거기에 있는 것만으 로도 아름다웠던,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을, 그러다 어떤 날에 무심코 두려움과 신비의 전율을 발견하게 될 숲 속으로 가는 길이 거기 있다.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주체적 개인”들의 소모적이고 야만적인 투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심미(審美, aesthetic)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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