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곶자왈

모든것이 얽히고 섞여있다. 생존을 하기위해 참아내야 하고 버텨야 하며 때로는 기회에 따라 그 정체를 들어내야 하고 한 번 나오면 갈 수 있는한 최대한 앞질러 가야한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멈추고 다시 땅속으로 숨어들어가야 한다. 이는 생존의 법칙이며 자연의 섭리인지 모른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다. 얹혀져 있고 덮혀져 있으며 깔려있고 부러져 있다. 그렇게 부러진 형태에 작은 기운이 몰래 숨죽이며 형태를 들어낸다. 이게 곶자왈이며 내가 보고자란 할머니, 어머니들의 삶의 이야기 같다.

내것을 내형태를 만들려하면 지저분한 덩쿨이 묶어버리고 눌러버려 더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얽어멘다. 그리고 끌어내린다. 숨죽여 기다리다 기운을 모으고 한차례 더 뻗어 올라간다. 아니 나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뻗쳐나간다. 그렇게 무수히 반복하면서 얽히고 섞여있다. 그 누가 주도 종도 아니다. 공존이며 기생이고 생존이다.


때론 그렇게 치열하게 생존하다 꺽이고 부러져 죽는다. 그렇다고 어느 무엇도 위로해주지 않는다. 죽어서 썩어버리는 그 터 위에 내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자연스레 색이바랜 형체는 하나둘 떨어져 다른 무언가의 거름이 된다. 그렇게 자연스레 흘러가고 거듭난다.

내가 먼저 있어거늘 진눌릴데로 진눌려 바닥이 되고 그곳에 내 숨구멍을 만든다. 조금씩 조금씩 널혀갈 뿐이다. 너무 들어나면 안된다. 그사이로 또 무엇인가 비집고 들어와 숨통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렇게 숨죽여 기다리며 틈을 만들어낸다.

자연결핍증

숲은 영혼의 안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편안한 쉼터이 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해줄수 있는 영성의 공 간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갖춰진 수목원 같은 상태의 조건속에서 가능 하다. 자연 그대로의 야생의 생태학적 공간의 숲은 공포 의 대상이기도 하다. 흔히 공포영화의 소재가 되는 미지 의 장소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 늑대나 곰을 만나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야생의 숲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인간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은밀한 신비 로움을 간직하는 미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마치 메리다 와 마법의 숲이나 아더왕의 전설이 있는 브로셀리엉드 숲처럼...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제주 곶자왈 숲 에서의 생활은 숲에 대한 이해를 돕고 풍경화를 다시금 그리게 해준 소중한 순간이었다. 아침 햇살이 높이 솟아 오른 숲속의 나무 사이로 내려오는 찬란한 천연숲의 모 습은 인공적인 환경에서 경험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아 름다움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해가 지고 어두움이 몰 려오는 순간부터는 모든 시각적 아름다움이 공포의 숲으 로 탈바꿈 되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동물과 자연의 소 리를 비롯하여 귀신의 노래소리와 같은 바람소리 그리고 칠흑같은 어둠은 모든 공포영화속 상상의 도구를 다 꺼 내놓게 하였다. 내가 머물던 곳에는 조그마한 숲길이 있 었지만은 그곳에서 10m만 벗어나면 뱀과 지네 그리고 한 번도 보지못한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야생 그자체였다. 딱 한 번의 야생탐방이 있었지만 그시간은 공포와 설레 임 그리고 두려움과 희열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준 시간 이기도 했다. 모든 것들이 뒤얽혀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 았다. 고목나무가 쓰러져 있고 그 옆으로 덤불과 이끼에 뒤덮힌 바위와 토목이 무성히 얽기섥기 우거져 자라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빌딩 숲보다 조화로웠으며 장엄하고 숭고하고 엄숙함에 대한 전율을 돋게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아니 현대 인간은 문명의 이기의 익숙함으로 더 이상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놀거나 다 른 생명체들과 교감하지 못하면서 신체.정서적 문제가 발생하는 ‘자연결핍증’ 증세를 갖고 있다. 나아가 야생 숲의 아름다움을 이해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힐링의 공간이고 영감의 원천이란 숲은 거 대한 야생의 숲이 아닌 인간에 맞추어 정렬된 인공의 수목원이다. 전세계적으로 자연보호라는 명목하에 많 은 활동이 있지만 이것은 단지 인간의 편리에 기준을 둔 조경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에는 존재의 이유 가 있다. 심지어 썱어버린 고목에게도 살아있는 초목에 양분을 제공하기 위한 존재가치가 있다. 하지만 환경 보호를 위해 꽃꽂이 하듯 눈에 보기좋은 것만 수집하고 그외의 것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불태우고 버리는 숲 의 조경은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나무와 숲은 저마다의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갈 능력 이 충분하므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는 페터 볼레벤의 말처럼 숲은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 는 나무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사회 모순 코드 

소년을위한 파랑, 소녀를위한 분홍

지금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색으로 성별을 구별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분홍 혹은 핑크일 것이다. 현대사 회에서 분홍색이 여성을 상징하고 남성을 파란색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이 성 고정관념의 대표 사례이기 때 문이다. 여기에서 더 큰 사회적 오류는 남자가 분홍 계열의 색상과 엮이면 동성애자 혹은 여성 같은 남자라는 사회적 시선으로 비꼬아 바라본다. 사회가 정한 다수의 코드에 따라가지 않으면 마치 불법행위를 한 것 인양 살벌한 주위의 시선에 난도질 당하는 느낌마저 든다. 18 세기까지 분홍색은 거의 독점적으로 남자와 관련이 있었다. 그 이유는 오래 전부터 힘과 권력의 상징이였던 피의상징인 빨강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중세 또는 르네상스의 그림에서 왕과 귀족은 종종 분홍색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했으며 여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색인 파란색을 입었다. 분홍이나 핑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것도 19세기에서나 만들어진 이름일뿐 빨강에 흰색 을 섞어 생생함의 상징으로 피부를 표현하는 살색의 대표적인 색상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후 18세기 후 반부터 사회는 예술과 문학의 코드를 재창조했다. 그리고 예술과 문학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색상의 의미 변화가 핑크색이다. 19세기의 낭만적인 운동이 자리잡은 이래로 핑크는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 그리고 단 맛의 구체화된 색상이 되었다.

Artist Note 2

In French, ‘ma chair’ means ‘my skin’. But my real intension with ‘ma chair’ focus on a word ‘cher’(same French different accents). Pronounce of ‘cher’ is almost same ‘cher’, but the meaning is totally different. Normally, we use the word ‘cher’ when we write a letter for greeting. And it means totally same a word ‘dear’ in English. In fact, I want to express ‘the scent of man’ or ‘the scent of flesh’ through my exploration of beauty. And, my pieces is a kind of expression for the regret what we forget the our real scent because the colorful appearance.
Whenever I hold the exhibition, I heard often a same question about the hidden message in my pieces. Every time I heard the question, I habitually answered like that ‘The artificial dressing and awkwardness of our contemporaries seen by media’. Frankly, I got used to say like this, even I didn’t try for showing my hidden mind. I spent over 20 years as an artist, I’ve been living for 17 years in France for expressing ‘the research of woman’s beauty’ through various decoration and makeup.
My recent pieces are the most colorful, vivid ever I pained as an artist. But my life isn’t like my pieces. I’d say the time of the most thoughtful in my life, if anything. It is true that I lose something important because too much decoration, makeup in my pieces. I just want to paint the flesh. Just our nature flesh with our ages which it is neither beautiful nor showing for boast. And I want to paint the flesh of middle age without decoration.

프랑스어로 ‘ma chair’로 나의 피부를 뜻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이 제목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같은 발음의 ‘cher’때문이다. 편지 인사말 및 여러 인사말 첫 문구로 자주 사용되며 ‘사랑하는, 친애하는, 경애하는’을 의미한다. 사실, 내가 미의 탐구를 통해 찾고자 하는 가장 큰 바램은 바로 인간의 냄새이자 살의 냄새이다. 점점 더 과잉으로 치닫는 화려한 겉치레로 우리의 본연의 냄새를 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표현이다.
전시회를 할 때마다 자주 듣는 질문이 그림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의례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현대인들의 인위적인 치장과 어색함’이란 문구를 다양하게 풀어 헤쳐가며 반복해 말하고 있다. 나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다른 관점에서 내 속내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벌써 20 여 년, 프랑스에서의 외국생활에 관한 아이덴티티를 대변하기 위해 ‘여성의 미의 탐구생활’이란 주제로 계속 서로 다른 치장과 화장을 통해 작업한지도 17년째다.
최근의 작품들이 그 동안 내가 그려왔던 어떤 작품들보다 화려한 치장과 장식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내 생활이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생각이 많은 시기라고 보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치장과 장식 속에 점점 더 살 냄새가 덮혀가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냥 살 만 그려보고 싶었다. 예쁘고 매끈하고 자랑하기 위해 다져진 살이 아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살. 때로는 무관심하게 방치해 놓은 시간이 묻어나는 중년의 살을 그려보고 싶었다.

Artist Note 1

심리학에서 다루어지는 페르소나(persona)의 사전적 의미는 타인에게 비춰지는 외적 성격을 일컫는다.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이 쓰던 가면들을 페르소나라 불리웠지만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바꾸어가며 사회적 요구에 적응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전시나 방송일로 한국에 갈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국 젊은 여성들 얼굴이 점점 비슷해지고 어색해진다는 점이다. 이는 패션 잡지나 다양한 미디어들이 하나의 유행이라는 틀을 만들어 새로운 미의 형태로 규정하고 선전한 결과일 것이다. 다양성보다는 창의를 빙자한 역상황의 균일한 틀 속에 갖춰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뻐졌다고 하는 면에서 강한 부정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인위적 아름다움을 자연스레 오랜시간을 바라볼 수 없다는게 문제다. 마주하고 있기가 불편한고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물론 미의 방식과 수용에서 어떤 제한을 둔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한다는 반론을 만들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특질, 환원불가능한 매력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점점 커져만 간다. 부자연스럼움과 부조화 속에서 요즈음에 와서는 예쁘고 미운게 뭔지 혼란스럽다.
어떤 회식자리에서 화장을 안한거는 예의가 없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놀라운게 아니라 이말에 모두 자연스레 수긍을 한다는게 더 놀라왔다.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이런 규정이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지만 치장은 사회생활을 위한 아니 상대방에게 갖추는 하나의 예의가 되어있다.
화장이나 변장 더 나아가 성형은 구스타프 융의 이론대로 페르소나를 쓰고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주는 타협점에 도달하게 해주는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게 된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화려함과 지나친 장식의 시대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인들은 옷무게만 10킬로가 넘었다고 한다. 이는 고래뼈로 만든 페티코트에 크리놀린에, 거기에 스커트를 두 개를 겹쳐입은 무게였다. 조선시대 머리에 얹던 가채는 화려하고 클수록 더 높은 지위를 상징했다. 화려한 가채에 떨잠들의 무게는 4~5킬로그램에 달하였다. 이로인해 아름다운 가채는 당시 여자들에게 목 디스크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목이 꺾여 목숨을 앗아 가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욕망의 속성은 건강이나 목숨에 대한 어떤 것도 불사한다.
장미수 베이스의 스킨케어 광고로 모로코여왕의 뷰티시크릿 담므 다뚜르(Dame d’atour)라는 광고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중세에 프랑스의 여왕과 왕비, 공주 등 왕실 여성들의 화장과 치장을 담당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3개국어가 섞여있는 광고 문구도 재미있지만 이 상품광고에서 중요시 여겨지는 바는 ‘전 세계의 왕실 뷰티시크릿 레시피’이다. 과거 왕실의 전유물을 사용함으로 이제 많은 여성들에게 우아하고 귀품있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더해준다는 부연설명이 있다. 많은 광고문구나 마케팅이 미를 위한 도구를 미의 형태로 한 시대의 미의 사회적 기준으로 규정하고 우리는 이를 추종하고 있다. 성형수술을을 한 번도 하지않은 사람들을 클린캠퍼스 혹은 천연기념물이라고 말을 하는 것 보면 그만큼 일반일에게도 성형수술이 일반화되었다는 이야기일텐데 화장품 문구로 뭐라 하는 것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하고 떠드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구닥다리 사고방식일지 모른다. 미의 문제,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만 들어가는 기분이다. 마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른다고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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