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불과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나무가 바람에게 부탁해 불러온 가시 덤불은 너무 크고 단단해서 사람들의 눈에 금방 띄었다. 사람들은 덤불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수소문해서 금방 모아왔다. 톱과 도끼를 이용해 가시 덤불들을 자르고 뜯어내 태우기 시작했다. 연약한 동물과 식물들의 보금자리였던 가시 덤불 숲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사람들은 그동안 가시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던 숲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곧게 하늘로 쭉 뻗은 큰 나무들만 골라 잘라내서 마을로 하나 둘 힘을 모아 옮겼다. 숲은 또다시 파헤쳐지고 망가지기 시작했다. 숲속의 새들과 동물들도 다른 터전을 찾아 이동을 하였다. 나무들은 또다시 땅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땅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무들은 주변의 풀들과 남겨진 덤불들에게 앞으로 살아남는 법에 대해 의논을 하자고 했다.
우선 잘려진 채 밑둥만 남은 나무들이 말했다. “사람은 직선으로 쭉 뻗은 큰나무만 좋아하니 이제부터 곡선으로 구부러져 자라야 겠어. 그리고 안 잘려나가긴 위해선 얇아져야만 해. 그래! 얇게 구불구불하게 자라자!” 나무의 말을 듣고 큰 나무 만큼이나 많은 상처를 입은 탱자나무가 이어 말했다. “나무의 말이 맞아. 사람들 눈에 띄게 너무 크게 만들어서 쉽게 잘라진 것 같아. 단단하게 만들어도 사람이 사용하는 도끼에 너무 쉽게 당하니, 더 없애기 어렵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만 해.” 그러자 사람들 발에 밟히고 짓이겨지고도 살아남은 작은 풀들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작고 부드러워서 밟혀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어. 우리처럼 덤불을 부드럽게 많이 만들면 어떨까? 단단하게 만드는데 드는 힘을 부드러우면서 질기게 만드는 데 쓰는 거야. 손으로 댕겨도 늘어날수 있게. 그리고 하나만 있으면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깐 그 뒤에서 잡아주고 또 뒤에서 잡아주고 계속해서 얽히고 설켜서 절대 풀어지지 않고 뜯어지지 않게 똘똘 뭉쳐버리는 거야. 얇고 부드럽지만 아주 튼튼한 벽이 되는 거지. 또 여기에 더해 그 전처럼 눈에 쉽게 보이는 큰 가시가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들로 촘촘하게 가지들을 덮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그냥 풀들이 모여있구나 생각하고 또 뜯어내려 하겠지. 그러다가 손과 팔 그리고 온몸에 가시가 다 박힐거야. 그러면 아프고 따갑다고 소리치면서 도망갈거야. 도끼와 톱으로 잘라내기 어렵지. 내 생각 어때?” 라고 하자 모든 식물과 나무는 굉장히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빨리 다른 곳의 식물들에게 알려야 된다고 했다. 모든 풀과 나무는 이 기쁜 소식을 멀리 있는 나무에게도 알리기 위해 땅 속에 세로로 내려져있는 뿌리들을 길게 가로로 뻗기 시작했다. 나무와 풀들의 뿌리들은 땅 속에서 서로 연결이 되어 덤불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이제 바람의 도움만 있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나무들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유연하면서 얇고 질기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덩쿨 씨앗들을 땅에 마구마구 뿌려 주었다. 나무들이 최대한 많이 가져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가시박, 돼지풀, 꺼끄랭이풀, 애기수영, 양미역취, 털불참새피, 물참새리, 도깨비가지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해갔고 나무들에 기대어 하늘로 하늘로 계속 올라갔다. 이중에 제일 으뜸은 가시박이였다. 가을이 되면 흰 가시로 뒤덮인 별사탕 모양의 열매가 1그루당 2만 5천개 이상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별사탕은 정말 좋은 무기였다.
사람들은 덤불을 파헤치고 자르고 불태우고를 반복하면서 덤불 제거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나무가지마저 둘러싼 덤불의 수에 쫓아갈 수 없었다.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고 끝이 없는 싸움이라 느끼며 포기하는 사람의 수는 늘어만 갔다. 점점 덤불이 없는 곳을 찾아 이동을 했다. 승리는 자연이 차지해 가는 듯 했다. 나무와 풀들은 덤불에게 고마움을 말하며 영원히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덤불은 거침없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덤불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단단한 무언가에 기대야만 했다. 나무를 찾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올라타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덩쿨이 한꺼번에 뒤섞여 올라가다 보니 더 이상 차지할 수 있는 나무가지조차 없었다. 덩쿨들은 땅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쳐져있는 또다른 덩쿨 위로 올라가며 새로운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나무 아니 나무가지조차 없자 어린 덩쿨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되고 두꺼운 덩쿨을 찾아 들러붙기 시작했다. 덩쿨들이 계속해서 꼬여만 갔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덩쿨들은 점점 군락을 형성하며 숲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덩쿨이 온 숲을 덮어버리자 나무와 풀들은 더 이상 햇살을 볼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보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과 덤불의 전쟁이 아닌 덤불 속에 가려진 식물과 나무들이 덤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상황이 왔다. 나무는 짤려 죽는게 나은지 숨막혀 죽는게 나은지에 대한 말도 안되는 고민에 휩싸였다. 더 이상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나무가 온갖 힘을 쏟아 하늘로 올라갈려고 해도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여있는 덤불을 뚫어낼 수 없었다. 나무가 덤불에게 이제 사람들이 떠났으니 우리를 놔달라고 해도 덤불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너무 심해져 버텨야만 하는 상황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나무는 덤불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용히 뿌리와 뿌리를 뻗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다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소녀는 숲에서 40m 정도로 가장 높게 자란 삼나무를 바라보며 나무가 서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 다다른 소녀는 나무에 오른손을 붙이고 나무를 위아래를 만져본 후 몸을 나무에 가져가며 꼭 안았다가 왼손을 뻗어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단 두 손만을 이용해 나무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나무를 계속 올라가다 가로로 튼튼하게 뻗은 가지를 보고 그 위로 자리를 옮겨 숲의 모습을 바라보고 숲 옆에 자리한 사람들의 마을을 바라보았다. 숲과 마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가지에서 내려와 다시 나무를 타고 높이 이어서 올라갔다. 나무의 꼭짓점에 다다른 소녀는 두발을 길게 뻗어 나무를 꽉 잡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또 한 번 부르르 떨자 몸에서 가시들이 또다시 나왔다 들어가며 알 수 없는 떨림의 소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새매, 참매를 선두로 동박새, 휘파람새, 오목눈이, 직박구리, 어치, 큰오색딱따구리, 수리부엉이, 꿩, 멧비둘기 등이 모여들어 소녀의 주위를 원 모양으로 감싸며 날갯짓을 하며 떠 있는 듯 멈춰있었다. 소녀의 가시들이 물결치듯 움직이며 내는 아주 작은 미세한 소리는 아니 파동들은 새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리고 가시의 움직임이 멈추자 움직임이 멈춘 듯 떠 있던 새들은 다시 재빨리 날갯짓을 반복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가시들은 소녀의 몸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고 소녀는 다시금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땅으로 내려온 소녀의 몸에는 삼나무 껍질과 열매 뾰족한 잎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를 본 소녀는 바닥에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며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 뒹굴뒹굴하다 몸을 보고 다시 뒹굴뒹굴하다 몸을 보고를 반복하다 보니 소녀는 어느덧 이파리 옷을 입은 듯 했다. 바닥에는 녹색 삼나무와 편백의 얇은 잎을 비롯하여 구상나무, 비자나무, 보리수나무, 하눌타리, 식나무, 붓순나무, 조릿대, 천남성의 잎과 열매, 그리고 동백꽃이 붙여져 다양한 색상과 형태의 조화가 이루어졌다.
화산재로 이루어진 돌들 위에 형성된 숲 바닥에는 작은 굴처럼 생긴 구멍의 숨골이 곳곳에 있어 사계절 내내 비슷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어 숲속은 항상 푸르름을 간직할 수가 있다.
숨골은 숲의 온도와 습지를 유지해 주면서 작은 동식물과 곤충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사람들이 숲을 파괴하던 순간에도 숨골이 있었기에 작고 연약한 동식물들이 이 속에 숨어서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때로는 뾰족하고 날카로워 다치기 쉬운 돌들로 바닥이 이루어져 있어 동물과 곤충들이 땅파기 놀이를 할 수는 없지만, 숨골이 있기에 이런 아쉬움을 해결해주고 숨바꼭질의 최적의 장소를 유지해 줌으로 위험한 상황에 노출이 되어도 숲의 아름다움을 유지해 줄 수 있는 비밀의 터이다.
나뭇잎 옷을 입은 가시 소녀는 돌바닥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었고 어느 구멍은 소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큰 구멍도 있었다. 큰 구멍을 보자 신기한 듯 소녀는 구멍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향해 몸을 숙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돌가시나무가 “들어가지 마, 위험해. 거기로 들어가면 바다로 흘러내려 갈 수 있어. 숨골은 지하의 동굴과 지상과의 공기의 순환 통로이며 물의 통로야. 이곳은 비가 많이 와서 이 통로가 없으면 홍수가 나서 모두 물에 잠겨 버릴 수가 있어 그리고 돌바닥이고 돌에 구멍들이 있어서 물들이 땅에 머물지 않고 지하로 내려가 지하수를 만드는데 사람들이 집 만들기 공사를 하면서 숨골들을 막아버리고 부수어 버리면서 지하수 고갈로 이 숲도 위험에 처하고 있지. 물론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위험한 상황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 아직 이름이 없는 가시 소녀야. 너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이 숨골만큼은 꼭 지켜주기 바란다. 숨골 덕분에 돌위에 형성된 숲임에도 우리가 존재할 수 있고 숨골이 만들어준 지하수를 마시며 견뎌낼 수 있는 거야. 난 이 하나만 부탁할게. 네가 조금 더 커서 너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이 숨골에 대해서 연구해 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아직은 이 숨골로 들어가기엔 위험한 게 너무 많아. 너는 아직 어리기에 좀 더 성장한 다음에 와 줘. 부탁해”라고 하자 소녀는 행동을 멈추고 돌가시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골의 돌들을 뿌리로 꼭 쥐어 잡고 있는 다른 나무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소녀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려 일어섰다. 소녀는 나무들과 소통이 가능하다. 동물들과의 소통 또한 가능하다. 이를 알게 된 나무들은 소녀에게 그동안의 숲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녀는 그저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소녀에게 전하는 바람 또한 들을 수 있었다. 나무들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소녀는 빠른 속도로 숲에 대해 알아가며 성장했다.
작은 섬이 있었다. 그 섬엔 섬을 뒤덮을 정도의 숲이 있었다. 하지만 숲속의 나무들은 높이 자랄 수가 없었다. 화산재로 만들어진 섬이기에 바닥이 돌투성이여서 울퉁불퉁하고 매우 거칠었다. 바닥의 돌들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이리저리 쪼개진 채로 날카롭게 굳어 있었다.
나무는 이런 돌 틈 사이로 뿌리를 힘겹게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천이 발달하지 않았고 빗물도 돌 위에 고이지 못한 채 대부분 지하로 내려갔다. 나무는 살기 위해 겨우겨우 힘을 내 뿌리로 돌을 꼭 움켜쥐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허무하게 쓰러지고 만다. 이렇게 살기 위해 뿌리에만 힘을 주다 보니 뿌리는 점점 두꺼워져만 갔고 모양도 울퉁불퉁 돌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나무는 위로 자랄 힘이 없었다.
섬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이 섬으로 많은 다양한 종류의 씨앗을 가지고 왔지만 섬에는 흙이 없었기에 많은 식물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어만 갔다. 그나마 운이 좋아 나무 위에 자리를 잡거나 아니면 쓰러져 죽은 나무들이 썩고 그 위에 떨어진 나뭇잎이 모여 마치 흙처럼 모여진 곳에 살포시 내려앉아 얇고 나약한 뿌리나마 내릴 수 있었다. 백서향, 방울난초, 개족도리풀, 바람꽃, 참개별꽃 등이 나무에 붙어서 살아갈 수 있었다. 나무는 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돌을 잡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다 보니 매일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고 주변의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없는 외로운 나날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씨앗들은 자라 나무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다른 세상의 소식들을 전해주며 재미있는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무와 작은 풀과 꽃들은 서로 사이좋게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섬에서 가까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난 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섬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밤이 되면 너무 추워 사람들은 부둥켜안고 버틸 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숲의 나무를 하나, 둘 베기 시작하면서 움막을 짓고 땔감으로 사용했다. 나무에 붙어살던 식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나무와 같이 죽어갔다. 나무와 풀들이 점점 줄어들자 사람들은 나무와 식물이 없으면 이 섬에서 오래도록 숨어 살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가 죽지 않을 만큼만 잘라 사용하는 법을 연구했다. 뿌리와 뿌리를 지탱하는 나무 밑동만 있으면 나무는 계속 다시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계산해서 잘라내며 작은섬에 터전을 마련했다.
나무는 딱 죽지 못할 만큼만 남겨진 상태에서 자라고 잘리고를 반복하며 두려움 속에 목숨을 겨우겨우 이어갔다. 나무는 매일매일 겁이 나고 또 언제 잘려나갈까 고민을 하며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더 높이 자랄 이유가 없어진 나무는 ‘자라면 또 잘라 없어질 텐데’라고 생각하며 땅에 “우리는 더는 이렇게 살아갈 이유가 없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게 도와줘”라고 부탁했다.
땅은 이 섬의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섬 또한 이런 식으로 자연이 망가져 가는 것을 그대로만 볼 수 없었다. 섬은 바람이잠시 머무는 동안에 섬의 나무들을 지킬 방법에 대해 도움을 청했다. 며칠 후 바람은 그동안 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씨앗을 가져와 상처가 많은 나무 위에 뿌려주었다. 씨앗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나무에 꼭 붙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양한 방향으로 서로서로 엇갈려 나무를 감아 올라갔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다 갈 길을 잃고 떨어진 가지들은 살길을 찾아 가장 가까운 다른 나무를 찾거나 자신이 붙어있던 나무로 다시 돌아가려 힘썼다. 그렇게 나무들은 굽이굽이 다양하게 휘어지고 뒤틀어지며 그전에 숲에서 볼 수 없던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나무에 서로 다른 형태로 엉겨 붙어자란 식물들과 어느새 얇은 나무의 형태를 띤 가지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덤불이 되었고 몸속의 가시들을 밖으로 꺼내었다.
가시딸기, 으름덩굴, 산유자나무, 청래미 덩굴, 탱자나무가 서로 모여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다. 가시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접근하기를 꺼렸다. 제법 효과가 좋았다. 나무는 바람에 더 많은 가시덤불 씨앗을 부탁했고 바람은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덤불씨앗을 또 다른 상처받은 나무를 찾아서 뿌려주었다. 덤불이 울창한 곳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끊겼다. 이제 안전한 터전이 만들어졌다. 뿔뿔이 흩어져 숨어있던 동박새, 팔색조, 긴꼬리딱새, 두견이, 알락할미새 등 작은 새들과 황조롱이, 벌매, 붉은배새매, 참매, 솔부엉이 등 가시덤불을 드나들 수 있는 제법 큰 새들로 뒤따라 왔다.
유혈목이, 비바리뱀, 줄장지뱀, 무당개구리 등 양서류와 파충류 그리고 등중쥐, 작은땃쥐, 집박쥐, 노루와 오소리, 족제비 등 다양한 동물들도 가시덤불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새들이 가시덤불 속으로 이동할 때 너무 예쁘지만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해 사람들에 의해 쉽게 뽑혀져 장식물이 되어버린 대흥란, 백운란, 솔잎란, 차걸이란, 으름난초 등의 씨앗을 덤불 속으로 옮겨주었다. 덤불 속에 있는 식물과 동물들은 활기차고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며 더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덜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섬에 점점 가시덤불이 많아지자 사람들의 터전이 위협을 받는다 생각했다.
덤불과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생각의 교환은 금방 탄로나버렸다. 나무의 뿌리와 그 뿌리만을 늘려 얘기를 한다는 건 애당초 있을 수 없는 불가항 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넝쿨의 줄기가 얽혀 있듯이 뿌리만 분리한다는것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 어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시덤불들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화가 치밀었다.
“새처럼 날개가 있니… 노루처럼 빨리 달릴 수가 있니… 잽싼 토끼처럼 숨을 수가 있니! 아무것도 못한 채 꼼짝없이 인간들에게 당하기만 하잖아. 도망이라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어. 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가지고 있던 가지, 잎, 껍질들을 포기하고 뾰족하게 가시로 만들 수밖에 없다고. 나도 예쁨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누군들 안 그러겠냐고... 근데 어떻게 해? 살아야지. 우선 살고 봐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너희들처럼 예쁘고 잘 생기면 뭐해. 뭐가 더 나은데……. 예쁘면 예쁜 대로 꺾여서 장식으로 쓰이다 말라죽고 곧게 뻗어 튼튼하게 잘생기면 도끼나 톱에 베여서 집 짓는데 사용되거나 가구로 만들어지니 결국은 죽고 말잖아. 어떻게 된 게 잘생기고 예쁘면 먼저 죽어버려. 그러니 이 모든 게 살기 위한 선택이잖아. 왜 우리에게만 뭐라 그러냐고. 내가 틀린 거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한 거야.”
가시박이 말하자 두릅나무, 엄나무, 가시오가피, 해당화와 골담초, 호자나무, 초피나무도 가시박의 말이 옳다고 소리를 더했다.그러자 모든 나무와 꽃과 풀들은 가시의 입장에 대해 그 어떤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계속 흐른 채 아무 말도 없자 환삼덩굴이 이어 말했다.
“너희는 보기 좋다고 사람들에게 관심이라도 받지. 우리는 보이는 순간 제거 당하고 미움받고 천대받으면서 지금까지 계속 버텨내는거야.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태어난 이상 살아야 되고 버티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걸 가시로 만들어서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버티는 거라고. 알겠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물러나라니……
도대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기 정말 힘들다.”
“너희들마저...”
“가시는 상처받은 이의 마지막 메시지인거야. 누군가를 아프게 하려고 공격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제발 제발 그냥 내버려달라고... 나 스스로를 포기하며 만들어낸 간절한 바람이야. 가시는 상처이자 아픔이야. 가시는 상처받은 자의 막다른 길에서의 마지막 선택이야. 나 스스로도 가시 때문에 아파... 자기방어를 위한 것일 뿐인데, 공격을 위한 무기로 여기는 갇혀진 편견에서 벗어나라…내가 친구라고 여기는 너희들부터 당장...”
울분을 주체할 수 없던 나머지 감정이 격해져서 더 이상의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난 후 나무가 대답을 했다.
“우리 입장에서 불편함과 어려움만 먼저 생각해서 미안해. 우리만의 오해로 인해 자연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닌, 우리끼리의 자멸의 연결 고리로 이어져 갈 수 있으니 좀 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보자. 가시덤불은 계속해서 그 수를 늘려나갈테고 나무들은 덤불에 가려져 숨쉬기 힘든 상황이 된 건 모두 사실이야. 인간 때문에 우리만 구석에 몰려서 찌그러지듯이 눌러붙어서 다툴 수만은 없지 않니? 그리고 우선, 우리의 땅을 다시 찾아보자. 가시넝쿨들아, 먼저 사람들의 땅으로 나아가 줄 수 있겠니? 나무들보다는 너희들이 좀 더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부탁하는거야. 너희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하는 건 아냐… 부디 오해하지 말아줘. 나무가 너희들만큼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우리가 뒤를 이어가 너희들의 버팀목이 될게.”
나무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설명으로 인해 점점 분위기는 안정되어 갔다.넝쿨들은 서서히 인간의 결계를 쳐놓은 담벼락으로 이동을 하며 아스팔트와 시멘트 틈 사이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조금씩 조금씩 그 수를 늘려가며 견고하게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시 넝쿨을 본 사람들은 이게 뭐냐고 전지가위를 가지고 나와 마구 잘라대며 집을 다시 손질했다. 하지만 이미 땅 속에는 많은 뿌리를 내린 넝쿨들이 있었다. 덤불은 기하급수적으로 줄기를 뻗으며 담벼락을 타고 올라갔다. 이 세상 모든 건 진화한다. 사람들의 모든 기준은 예쁘고 아름다운 외관에만 치우쳐져 있다는 것을 넝쿨들은 이미 알아차렸기에 넝쿨은 온 몸으로 짜내듯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또 빨갛고 새콤달콤한 열매 또한 보란 듯이 선물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토록 혐오하던 가시넝쿨들에게 향했던 시선이 달라졌다. 편협된 시선에서 호감 어린 시선으로… 인간들은 열매를 얻기 위해 그토록 회피하던 넝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넝쿨들은 이제 가시를 만들기 보다는 인간들을 현혹시킬 꽃과 열매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리 길게 끌어가지는 못했다. 어린 아이들이 열매를 따기 위해 넝쿨쪽으러 향하다 가시에 찔려 피가 나는 일이 많아지자 잠깐의 평화로운 꿈은 바람에 날려버리듯 순식간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가시는 다시 제거의 대상으로 부각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친김에 다시 숲으로 들어와 가시넝쿨들을 모조리 제거하기에 뜻을 두더니 이내 인간들의 영역확장이 다시금 시작되어버렸다.
이번의 경우는 예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인간은 가시넝쿨 제거에 대해 더욱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고 집착성으로 기울어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무와 꽃들을 뽑아내 인간들이 구경하기 편하도록 재배치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생각과 도구는 계속 진화했지만 자연은 이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무와 풀들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을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한 채 다시 한번 땅에게 도움을 청했다. 땅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할 방법이 없는 나무들은 그저 간절함을 담은 기도만을 계속할뿐……. 그러자 어느 날 신기한 모양의 새로운 가시풀들이 땅 밖으로 뚫고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연야린 가시줄기들은 투명하며 영롱한 빛을 내며 길게 뻗어갔다. 투명한 실핏줄과 같은 얇고 가냘퍼 금방이라도 끊어질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나온 실같은 줄기들이 한쪽 방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얇고 투명한 줄기 속에서는 영롱한 분홍빛들이 새어나고 있었고 선들이 얽힐수록 빛은 점점 더 밝아져 그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커다란 분홍빛은 점점 밝은 하얀 빛으로 변해가고 어둠을 삼키며 커다란 횃불과도 같은 빛이 뭉치로 주변을 점점 더 밝혔다.
땅이 자연에게 주는 새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다.
모든것이 얽히고 섞여있다. 생존을 하기위해 참아내야 하고 버텨야 하며 때로는 기회에 따라 그 정체를 들어내야 하고 한 번 나오면 갈 수 있는한 최대한 앞질러 가야한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멈추고 다시 땅속으로 숨어들어가야 한다. 이는 생존의 법칙이며 자연의 섭리인지 모른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다. 얹혀져 있고 덮혀져 있으며 깔려있고 부러져 있다. 그렇게 부러진 형태에 작은 기운이 몰래 숨죽이며 형태를 들어낸다. 이게 곶자왈이며 내가 보고자란 할머니, 어머니들의 삶의 이야기 같다.
내것을 내형태를 만들려하면 지저분한 덩쿨이 묶어버리고 눌러버려 더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얽어멘다. 그리고 끌어내린다. 숨죽여 기다리다 기운을 모으고 한차례 더 뻗어 올라간다. 아니 나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뻗쳐나간다. 그렇게 무수히 반복하면서 얽히고 섞여있다. 그 누가 주도 종도 아니다. 공존이며 기생이고 생존이다.
때론 그렇게 치열하게 생존하다 꺽이고 부러져 죽는다. 그렇다고 어느 무엇도 위로해주지 않는다. 죽어서 썩어버리는 그 터 위에 내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자연스레 색이바랜 형체는 하나둘 떨어져 다른 무언가의 거름이 된다. 그렇게 자연스레 흘러가고 거듭난다.
내가 먼저 있어거늘 진눌릴데로 진눌려 바닥이 되고 그곳에 내 숨구멍을 만든다. 조금씩 조금씩 널혀갈 뿐이다. 너무 들어나면 안된다. 그사이로 또 무엇인가 비집고 들어와 숨통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렇게 숨죽여 기다리며 틈을 만들어낸다.
숲은 영혼의 안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편안한 쉼터이 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해줄수 있는 영성의 공 간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갖춰진 수목원 같은 상태의 조건속에서 가능 하다. 자연 그대로의 야생의 생태학적 공간의 숲은 공포 의 대상이기도 하다. 흔히 공포영화의 소재가 되는 미지 의 장소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 늑대나 곰을 만나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야생의 숲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인간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은밀한 신비 로움을 간직하는 미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마치 메리다 와 마법의 숲이나 아더왕의 전설이 있는 브로셀리엉드 숲처럼...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제주 곶자왈 숲 에서의 생활은 숲에 대한 이해를 돕고 풍경화를 다시금 그리게 해준 소중한 순간이었다. 아침 햇살이 높이 솟아 오른 숲속의 나무 사이로 내려오는 찬란한 천연숲의 모 습은 인공적인 환경에서 경험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아 름다움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해가 지고 어두움이 몰 려오는 순간부터는 모든 시각적 아름다움이 공포의 숲으 로 탈바꿈 되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동물과 자연의 소 리를 비롯하여 귀신의 노래소리와 같은 바람소리 그리고 칠흑같은 어둠은 모든 공포영화속 상상의 도구를 다 꺼 내놓게 하였다. 내가 머물던 곳에는 조그마한 숲길이 있 었지만은 그곳에서 10m만 벗어나면 뱀과 지네 그리고 한 번도 보지못한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야생 그자체였다. 딱 한 번의 야생탐방이 있었지만 그시간은 공포와 설레 임 그리고 두려움과 희열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준 시간 이기도 했다. 모든 것들이 뒤얽혀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 았다. 고목나무가 쓰러져 있고 그 옆으로 덤불과 이끼에 뒤덮힌 바위와 토목이 무성히 얽기섥기 우거져 자라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빌딩 숲보다 조화로웠으며 장엄하고 숭고하고 엄숙함에 대한 전율을 돋게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아니 현대 인간은 문명의 이기의 익숙함으로 더 이상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놀거나 다 른 생명체들과 교감하지 못하면서 신체.정서적 문제가 발생하는 ‘자연결핍증’ 증세를 갖고 있다. 나아가 야생 숲의 아름다움을 이해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힐링의 공간이고 영감의 원천이란 숲은 거 대한 야생의 숲이 아닌 인간에 맞추어 정렬된 인공의 수목원이다. 전세계적으로 자연보호라는 명목하에 많 은 활동이 있지만 이것은 단지 인간의 편리에 기준을 둔 조경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에는 존재의 이유 가 있다. 심지어 썱어버린 고목에게도 살아있는 초목에 양분을 제공하기 위한 존재가치가 있다. 하지만 환경 보호를 위해 꽃꽂이 하듯 눈에 보기좋은 것만 수집하고 그외의 것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불태우고 버리는 숲 의 조경은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나무와 숲은 저마다의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갈 능력 이 충분하므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는 페터 볼레벤의 말처럼 숲은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 는 나무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소년을위한 파랑, 소녀를위한 분홍
지금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색으로 성별을 구별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분홍 혹은 핑크일 것이다. 현대사 회에서 분홍색이 여성을 상징하고 남성을 파란색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이 성 고정관념의 대표 사례이기 때 문이다. 여기에서 더 큰 사회적 오류는 남자가 분홍 계열의 색상과 엮이면 동성애자 혹은 여성 같은 남자라는 사회적 시선으로 비꼬아 바라본다. 사회가 정한 다수의 코드에 따라가지 않으면 마치 불법행위를 한 것 인양 살벌한 주위의 시선에 난도질 당하는 느낌마저 든다. 18 세기까지 분홍색은 거의 독점적으로 남자와 관련이 있었다. 그 이유는 오래 전부터 힘과 권력의 상징이였던 피의상징인 빨강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중세 또는 르네상스의 그림에서 왕과 귀족은 종종 분홍색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했으며 여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색인 파란색을 입었다. 분홍이나 핑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것도 19세기에서나 만들어진 이름일뿐 빨강에 흰색 을 섞어 생생함의 상징으로 피부를 표현하는 살색의 대표적인 색상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후 18세기 후 반부터 사회는 예술과 문학의 코드를 재창조했다. 그리고 예술과 문학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색상의 의미 변화가 핑크색이다. 19세기의 낭만적인 운동이 자리잡은 이래로 핑크는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 그리고 단 맛의 구체화된 색상이 되었다.
In French, ‘ma chair’ means ‘my skin’. But my real intension with ‘ma chair’ focus on a word ‘cher’(same French different accents). Pronounce of ‘cher’ is almost same ‘cher’, but the meaning is totally different. Normally, we use the word ‘cher’ when we write a letter for greeting. And it means totally same a word ‘dear’ in English. In fact, I want to express ‘the scent of man’ or ‘the scent of flesh’ through my exploration of beauty. And, my pieces is a kind of expression for the regret what we forget the our real scent because the colorful appearance.
Whenever I hold the exhibition, I heard often a same question about the hidden message in my pieces. Every time I heard the question, I habitually answered like that ‘The artificial dressing and awkwardness of our contemporaries seen by media’. Frankly, I got used to say like this, even I didn’t try for showing my hidden mind. I spent over 20 years as an artist, I’ve been living for 17 years in France for expressing ‘the research of woman’s beauty’ through various decoration and makeup.
My recent pieces are the most colorful, vivid ever I pained as an artist. But my life isn’t like my pieces. I’d say the time of the most thoughtful in my life, if anything. It is true that I lose something important because too much decoration, makeup in my pieces. I just want to paint the flesh. Just our nature flesh with our ages which it is neither beautiful nor showing for boast. And I want to paint the flesh of middle age without decoration.
프랑스어로 ‘ma chair’로 나의 피부를 뜻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이 제목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같은 발음의 ‘cher’때문이다. 편지 인사말 및 여러 인사말 첫 문구로 자주 사용되며 ‘사랑하는, 친애하는, 경애하는’을 의미한다. 사실, 내가 미의 탐구를 통해 찾고자 하는 가장 큰 바램은 바로 인간의 냄새이자 살의 냄새이다. 점점 더 과잉으로 치닫는 화려한 겉치레로 우리의 본연의 냄새를 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표현이다.
전시회를 할 때마다 자주 듣는 질문이 그림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의례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현대인들의 인위적인 치장과 어색함’이란 문구를 다양하게 풀어 헤쳐가며 반복해 말하고 있다. 나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다른 관점에서 내 속내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벌써 20 여 년, 프랑스에서의 외국생활에 관한 아이덴티티를 대변하기 위해 ‘여성의 미의 탐구생활’이란 주제로 계속 서로 다른 치장과 화장을 통해 작업한지도 17년째다.
최근의 작품들이 그 동안 내가 그려왔던 어떤 작품들보다 화려한 치장과 장식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내 생활이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생각이 많은 시기라고 보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치장과 장식 속에 점점 더 살 냄새가 덮혀가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냥 살 만 그려보고 싶었다. 예쁘고 매끈하고 자랑하기 위해 다져진 살이 아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살. 때로는 무관심하게 방치해 놓은 시간이 묻어나는 중년의 살을 그려보고 싶었다.
심리학에서 다루어지는 페르소나(persona)의 사전적 의미는 타인에게 비춰지는 외적 성격을 일컫는다.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이 쓰던 가면들을 페르소나라 불리웠지만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바꾸어가며 사회적 요구에 적응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전시나 방송일로 한국에 갈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국 젊은 여성들 얼굴이 점점 비슷해지고 어색해진다는 점이다. 이는 패션 잡지나 다양한 미디어들이 하나의 유행이라는 틀을 만들어 새로운 미의 형태로 규정하고 선전한 결과일 것이다. 다양성보다는 창의를 빙자한 역상황의 균일한 틀 속에 갖춰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뻐졌다고 하는 면에서 강한 부정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인위적 아름다움을 자연스레 오랜시간을 바라볼 수 없다는게 문제다. 마주하고 있기가 불편한고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물론 미의 방식과 수용에서 어떤 제한을 둔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한다는 반론을 만들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특질, 환원불가능한 매력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점점 커져만 간다. 부자연스럼움과 부조화 속에서 요즈음에 와서는 예쁘고 미운게 뭔지 혼란스럽다.
어떤 회식자리에서 화장을 안한거는 예의가 없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놀라운게 아니라 이말에 모두 자연스레 수긍을 한다는게 더 놀라왔다.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이런 규정이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지만 치장은 사회생활을 위한 아니 상대방에게 갖추는 하나의 예의가 되어있다.
화장이나 변장 더 나아가 성형은 구스타프 융의 이론대로 페르소나를 쓰고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주는 타협점에 도달하게 해주는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게 된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화려함과 지나친 장식의 시대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인들은 옷무게만 10킬로가 넘었다고 한다. 이는 고래뼈로 만든 페티코트에 크리놀린에, 거기에 스커트를 두 개를 겹쳐입은 무게였다. 조선시대 머리에 얹던 가채는 화려하고 클수록 더 높은 지위를 상징했다. 화려한 가채에 떨잠들의 무게는 4~5킬로그램에 달하였다. 이로인해 아름다운 가채는 당시 여자들에게 목 디스크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목이 꺾여 목숨을 앗아 가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욕망의 속성은 건강이나 목숨에 대한 어떤 것도 불사한다.
장미수 베이스의 스킨케어 광고로 모로코여왕의 뷰티시크릿 담므 다뚜르(Dame d’atour)라는 광고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중세에 프랑스의 여왕과 왕비, 공주 등 왕실 여성들의 화장과 치장을 담당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3개국어가 섞여있는 광고 문구도 재미있지만 이 상품광고에서 중요시 여겨지는 바는 ‘전 세계의 왕실 뷰티시크릿 레시피’이다. 과거 왕실의 전유물을 사용함으로 이제 많은 여성들에게 우아하고 귀품있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더해준다는 부연설명이 있다. 많은 광고문구나 마케팅이 미를 위한 도구를 미의 형태로 한 시대의 미의 사회적 기준으로 규정하고 우리는 이를 추종하고 있다. 성형수술을을 한 번도 하지않은 사람들을 클린캠퍼스 혹은 천연기념물이라고 말을 하는 것 보면 그만큼 일반일에게도 성형수술이 일반화되었다는 이야기일텐데 화장품 문구로 뭐라 하는 것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하고 떠드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구닥다리 사고방식일지 모른다. 미의 문제,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만 들어가는 기분이다. 마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른다고 말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