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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와 공포의 ‘숲’으로부터 공생의 ‘자연’으로

_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숲에 이르기까지
재불 화가 홍일화는 그동안 인간의 다양한 형상을 표현한 구상 회화를 통해서 인간이라는 주 제 의식에 천착해 왔다. 미메시스의 조형 언어와 맞물린 밝고 화려한 색감 그리고 활달하고 경쾌한 붓질로 인간이란 단어와 병치해서 탐구해 온 욕망, 소비, 패션, 사회, 역사 등의 테마 가 그것이다.

그러던 그가 최근 ‘숲’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 그가 얼마 전 제주도 곶자왈에서 체류하며 작업했던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가족과 떨어져 홀로 제주도 외딴 깊은 숲 에 들어가 날마다 숲과 맞닥뜨리면서 생활하고 작업했던 경험이 작업의 주제를 전환하게 된 동인(動因)이었다. 물론 그가 20여 년간 탐구해 오던 ‘인간’이라는 테마를 던져 버리고 완전히 숲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단어와 병치해서 탐구할 테마로서 자연은 늘 작가의 창 작을 위한 고려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탐구할 대상이었지만 그 계획이 빨리 찾아 왔다.

자연은 ‘바다, 강, 땅, 숲, 동식물’ 등으로 대별된다. 특히 홍일화가 곶자왈에서 날마다 대면했 던 ‘숲’이라는 이름의 자연이었다. 숲은 강, 땅, 동식물 등을 껴안은 자연이다. 모든 세밀한 자 연의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면서 자연을 은유하는 것이 숲인 셈이다. 홍일화에게 ‘숲’이란 곧 자연을 의미하는 ‘제유(提喩)의 장치가 된다. 제유란 부분이 전체를 대변하는 비유의 방식이 다. 백발이 노인을, 빵이 식량을 제유의 방식으로 비유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인 간으로부터 자연으로 화제를 바꾸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은 숲이었다. 자연을 대별하는 ‘숲’은, 작가 홍일화에게, 곶자왈을 만나기 전까지는 보편적이고도 관성적인 인식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숲’이란 소풍, 산책, 등산 등의 사건으로 대면했던 ‘소소한 경험의 대상’이자, ‘오지 체험’과 같은 방송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간접 경험하게 된 단순한 대상’일 따 름이었다. 문명의 때를 벗고 잠시나마 휴양을 빌미로 찾는 도시로부터의 도피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위로의 공간, 현대인의 지독한 경쟁적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명상의 공간과 같은 것 이 그동안 작가가 인식하던 숲과 자연이었다.

그런데 작가 홍일화가 직접 몸으로 곶자왈이라는 ‘숲’을 맞닥뜨리면서 변화가 왔다. 우리는 안 다. 체험(體驗)이라고 불리는 직접 경험은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홍일화가 무심하게 바라보거나 멀리 떨어진 채 대상화하는 정도에 그쳤던 ‘숲과 자연’ 에 대한 생각이 제주 ‘곶자왈’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맞이하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 변화 란 무엇인가? 그것은 곶자왈이리는 장소성과 맞물리면서 야기되는 ‘무엇’이다. 숲이라는 의미 의 ‘곶’과 덤불이라는 뜻의 ‘자왈’의 합성어인 곶자왈은 제주 방언으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야 생 고유의 숲”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한 다. 보라! 평탄하지 않은 산기슭과 바위들 그리고 그곳을 휘어감 듯이 자라는 식물 넝쿨과 그 곳을 지나는 야생의 동물들은 곶자왈이라는 숲을 삶의 무대로 삼는다.

작가 홍일화가 숲을 통해서 자연을 재성찰하게 된 작금의 상황을 수학적인 문법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인간을 정의역(定義域)이라 할 때 자연은 공역(共域)이고 숲은 치역(値域)인 셈이다. 이것을 함수의 기호로 표기하면 ‘f: 인간 → 자연’이 되겠다. 치역인 숲은 공역인 자연의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다 이야기하지는 못해도 전체의 한 부분을 강렬하게 전한다. 숲으로서의 ’자연‘은 작가 홍일화에게 무엇을 강렬하게 전하고 있는가?

II. 미지와 공포의 숲
작가 홍일화가 곶자왈을 소재로 그린 작품을 보자. 마치 오랑주리 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모네 (C. Monet)의 수련 연작 벽화처럼, 7점의 커다란 캔버스가 한 쌍을 이룬 채, 전시장 벽면 가 득히 풍경을 만들고 있다. 이내 초록색이 배어 나올 듯한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화이트큐브의 공간은 곶자왈의 숲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물방울이 서린 유리창을 통해서 밖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처럼 난초점(亂焦點)을 드러내는 그의 곶자왈 풍경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이슬 을 흠뻑 먹거나 풀잎 위에 윤슬을 가득 얹은 것 같은 일렁이는 초록의 풍광 위에는 검은 나무 들이 몸을 뒤틀고 똬리를 틀면서 화면을 횡단한다.

그의 풍경화에는 이전의 인물화에서 보이던 일련의 점묘법이 여전히 자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면, 물감을 펼치고 이지러뜨리는 좀 더 분방한 필치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 이 눈, 코, 입처럼 시선을 끄는 부분과 얼굴 표정에 집중하던 인물화와 달리, 그의 최근 풍경 화에서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초점을 버리고 다초점이나 난초점으로 풍경을 아우르고 있기 때 문이다. 그의 풍경화에서는, 실제의 자연이 그러하듯, 그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하 거나 특별하지 않다. 그저 꽃과 나무, 풀잎이 사이좋은 이웃처럼 자리하면서 조화로운 이미지 를 만들어 낸다. 화폭을 가득 채우며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풍경화를 보라. 그곳에 는 마치 들판의 꽃 무더기를 뷰파인더에 가득 들어오도록 접사(接寫)로 촬영한 듯한 ‘꽃들의 이미지’가 한가득하다. 이러한 작품에는 ‘렌즈로 필름에 담은 이미지와 뷰파인더로 포착한 이 미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뷰파인더의 시차(視差)’가 워낙 좁아서 ‘혼자 잘난 존재’가 끼 어들 틈이 없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어떠한 무엇이 또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을 리 없다.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세계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의 풍경화에는 이상적인 조화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들 또한 발견된다. 바로 추상적 이미지로 남는 미지(未知)의 영역이 그것이다. 이 영역 안에는 무엇인가 특정하거나 구체화할 수 없는 ‘모호하거나 초현실적인 풍경’이 그 안에 자리한다. 때론 모호해서 추상적이거나 때론 기이해서 초현실적인 풍경은 홍일화의 작품에서 가로선을 축으로 한 심층(深層)에 자리한다. 즉 화면의 위가 ‘현실 속 지(知)’의 영역이라면 화면 아래는 ‘추상 혹은 초현실의 미지 영역’이 다.

작품을 보자. 숲 속 호수로 보이는 물가에 홍학이나 두루미처럼 보이는 기다란 다리를 가진 새 한 마리가 서 있고 호수의 표면 위에 이 새의 모습이 반영된 채 그려져 있다. 현실계의 홍 학처럼 보이는 새의 정체도 그다지 명확하지 않지만 그 아래 반영체의 모습은 모호한 핑크 (pink)의 덩어리일 따름이다. 또 다른 작품들을 보자. 숲과 호수를 구분하는 듯한 수평선이 자 리한 화면 위에는 연기처럼 불분명한 형체의 덩어리가 떠 있고 그 아래 수면에 그림자처럼 반 영된 희미한 이미지를 드리우고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색색의 버섯으로 보이는 부채꼴 형상 이 수면 위에 자리하고 그 아래 반영된 역상 이미지가 쌍을 이루면서 하나의 특정할 수 없는 원형 생명체의 모습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들에 작가는 ‘임시풍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두 단어를 고의로 붙여쓰기해 서 ‘고유명사’처럼 만든 작품명 ‘임시풍경’은 그가 대면하는 자연 풍경이 어느 하나 고정된 것 이 없이 변화를 지속하는 존재임을 피력한다. 위의 작품들에서 수면 위 ‘현실 속 지’의 영역조 차 모호하거나 특정하기 어려울진대 수면 아래 ‘비현실 속 미지’의 영역은 더할 나위 없다. 양자 모두 자연의 순환과 임시적 변화를 지속하는 운동의 공간인 셈이다. 다르다면 ‘현실 속 지’ 의 영역은 순환과 변화의 질서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만, ‘비현실 혹은 초현실 속 미지’ 의 영역은 그 변화의 영역을 가늠하기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홍일화에게 곶자왈처럼 ‘현실 속 비현실적인 숲’은 이러한 대비의 미학이 쌍을 이룬 채 우리 에게 선보이는 ‘임시풍경’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어 안는다. 곶자왈의 현실 속 숲은 이러한 현 실과 초현실주의 영역을 두루 함유하는 까닭에 미지의 영역을 극대화한다. 우리는 안다. 이러 한 미지의 영역이 공포와 연동되어 있음을 말이다. 곶자왈이라는 숲속은 산길이라고 찾을 길 없는 돌과 암석, 그 위를 뒤덮는 야생의 풀꽃과 식물 넝쿨들로 우거져 있어, 낮이든 밤이든 우리를 ‘낯선 공포’ 속으로 이끈다. 숲의 공포! 그것은 우리가 정원(庭園) 혹은 공원(公園)이라 일컫는 ‘인공 자연’이 주는 안락함처럼 간단하고 명쾌하지 않다. 꽃과 잔디와 호수로 구획되고 정리된 공원의 모습과 달리 곶자왈과 같은 숲은 야생의 날것들을 위한 길만을 내어줄 뿐, 빛 과 그늘을 한 덩어리로 품는다.

어둡고 모든 것이 뒤섞인 듯이 보이는 이 곶자왈이라는 숲에는 애초에 인간을 위한 자리가 없 다. 모든 것이 ‘인간이 아닌 존재’만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해 온 까닭이다. 곶자왈은 다람쥐와 노루, 그리고 날짐승의 공간이자, 숲속의 모든 식물을 위한 공간이다. 인간은 애초에 없는 공 간인 것이다. 이 미지의 공간에서 인간이 ‘인간 소외와 낯섦 그리고 불안한 공포’를 느끼는 것 은 당연한 일이리라.

III. 공생의 자연
태초의 신화 세계로부터 인간과 함께했던 ‘숲’은 이제 인간과 별리된 채 그들만의 세상을 만 들고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이별은 ‘숲’이 자발적으로 행한 고립화가 아니라 인간이 현대 문명을 통해 숲을 대상화시키면서 도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 간 편의와 안락’을 지향하는 ‘인간의 문명학’이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우뚝 세우지만, 결국 인 간 주체가 속했던 옛 고향인 자연과의 영원한 결별, 이혼의 체계를 공고히 한 결과이기도 하 다. 즉 ‘인간의 욕망이 야기한 문명학’이 결국 자연을 정복하고 구속하면서부터 자연에게 결별 을 통보하고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결별의 시대에 인간과 자연은 어떻게 공생을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대 상화시켰던 ‘자연을 주체가 되게 만드는 역전의 방식’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즉 자연을 생태계 의 주인공으로 초대하여 ‘인간과의 공생’을 부단히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생이란 생물학 적 용어로, 한쪽만 이득을 얻고 다른 한쪽은 이득도 손해도 없는 ‘편리공생(commensalism)’ 이기보다 양쪽 모두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mutualism)’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점은 퐁티 (M. Merleau-Ponty)식으로 말해 인간과 자연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구분이 없는 상호 작용 의 존재’임을 일깨운다.

작가 홍일화의 작품에서 이러한 공생의 주제 의식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현되는가? 먼저는 그가 맞닥뜨린 곶자왈의 혼성의 숲 자체가 이러한 공생의 주제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할 것이다. 풀, 꽃, 나무, 곤충, 동물, 암석이 마치 한 덩어리처럼 휘감고 있는 야생의 숲은 대표 적인 특징이다. 게다가 숲의 풍경을 담은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등장하지 않지만, 수평선 상 단의 ‘동식물, 강, 호수, 땅’과 같은 ‘현실 속 자연’과 더불어 수평선 하단의 ‘비현실 속 상상 자연’이 쌍을 이루면서 인간의 등장을 암시한다. 즉 상상의 주체인 인간을 화면(畫面) 밖 공간 에 위치시킴으로써 화면 안 공간과 상호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화면 밖 인간 주체의 등장)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화면 안에 자리 하고 있는 것’은 정체불명의 모호한 형상과 함께 ‘핑크’라는 인공의 색과 연동된다는 것이다. 어두운색을 배경으로 한 채 작품 중앙이나 주변에 위치한 핑크의 ‘사물 아닌 사물’은 인간 주 체의 상상력과 연계되면서 고루하고 관성적인 인식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한다. ‘인간 주체는 화면 속에 구체적인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화면 속 핑크는 인간의 정체성을 어렵지 않게 암시한다.

생각해 보자. 우리말로 분홍(粉紅)인 핑크는 ‘엷고 부드러운 빨강’을 지칭한다. 즉 하얀색의 혼 성을 통해 무채색이 된 엷은 빨강이다. 그런 점에서 핑크는 ‘빨강과 하양 사이의 교집합’인 셈 이다. 핑크는 자연에서 더러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연스럽지 않은 인공의 색이자 인간이 만든 색이며 ‘인간의 색’이라 할 것 이다. 그동안 핑크에는 사회학의 관점에서 만연된 ‘여성적 색’이라는 관습적 기호가 작동해 왔다. 작가 홍일화는 “소년을 위한 파랑, 소녀를 위한 분홍”이라는 글로 이러한 색에 담겨진 우리의 고정 관념과 관성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더한다. 즉 그는 핑크가 중세와 르네상 스 시대에 권력과 관련되었고, 18세기까지는 남자와 관련되었으며 19세기에 비로소 작명된 이 름임을 설파한다. 오늘날 여성의 색으로 간주되는 핑크가 지닌 개념의 변천사에는 이러한 사 회학적 코드가 진하게 배어있다.

인물 형상을 다룬 ‘스키마 연작’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던 인공 색 핑크는 홍일화의 최근 풍경 화 속에 새롭게 자리 잡은 채, 오늘도 인간과 자연의 공생의 의미를 되새긴다. 화면 속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존재를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상과 더불어 생생한 핑크의 인공 색으로 탐색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 형상으로부터 숲을 탐구하는 그의 최근작은 미지와 공포의 숲으 로부터 공생의 자연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대면하고 있는 다양한 테마, 즉 욕망, 소비, 패션, 사회, 역사와 같은 주제 의식은 이제 숲으로 대별되는 자연으로 이월하 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중심으로 간 주되던 주제의식으로부터 상대화되고 다원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IV. 에필로그 작가 홍일화의 작품에 대한 필자의 거친 해석과 비평을 보충할 참고 자료들은 대개 인간이 대 면하고 있는 자연과의 공생의 존재론과 공생의 생태학에 관한 이론들이다. 먼저는 자연을 바라보는 대상으로 간주하기보다 인간과 대면한 새로운 주체로 인식하고자 하 는 사유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가 인용하는, “풍경 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세잔의 언급은 주요하다. 마치 인 간 주체와 자연 대상의 역전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이러한 언급은 실상 우리에게 주체와 객 체라는 것이 애초부터 상호 교환되는 역동적 관계임을 알려 준다. 메를로퐁티 역시 “하나의 신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신체는 일차적으로 공간 속에 있 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일부이다.”라는 언급을 통해서 주체와 객체가 혹은 인간과 자 연이 상호적 작용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한편 자연에 관한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존재론에 관한 이론들이다. 퐁티에 따르면, 가시성의 세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시성이 하나의 특정한 부재로 현존하게 하는 비가시성의 층을 가지고 있다.” 즉, 보이는 것이 야기한 부족분은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를 이해할 때, 가능해 진다. 비가시성은 가시성이 배제시킨 잔여물이기보다 원초적인 것이다. 퐁티에게서 비가시적인 것의 본질은 ‘깊이(profondeur)’로 언급된다. ‘가장 안쪽’, ‘깊숙한 곳’인 이 ‘깊이’는 “사 물들이 순수하게 머물 수 있는, 즉 사물들이 사물들로 머물 수 있는 수단이다. 깊이가 없다면 하나의 세계 혹은 존재는 없을 것”이다. 퐁티에 따르면, 주체가 대상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 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야 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해야 하며, 자신을 동 시에 도처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논의대로 말하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 주체의 관점 역시 이러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피상적인 자연의 외관에 대한 관성적 인식을 탈주하고 자연의 외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보려는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 하나의 사유는 자연의 생태학에 관한 것이다. 생태학자 캐롤린 머천트(C. Merchant)가 밝 히고 있듯이 오늘날의 자연에 관한 연구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과 정신생태학 (Spiritual ecology)에서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심층생태학과 정신생태학이 자연과 환경을 궤멸시킨 주범으로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주의로 규 정하면서 그것을 반대하거나 탈주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환경의 입장에 서서 ‘훼손된 자연의 복구’ 자체에 집중하면서 ‘가역적 방향성’에 집중해 왔다면, 사회생태학은 인간중심주의와 이 성주의를 균형감 있게 취함으로써 오늘날 복잡다기한 사회에서의 ‘근원적인 생태로의 회복’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성찰하면서 ‘비가역적 방향성’을 견지하는 생태학이기 때 문이다. 오늘날 요청되는 생태학은 자연에 대한 이러한 비가역적 방향성에 대한 것이라 하겠 다. 오늘날 생태학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적 만남과 미래의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 을 화두로 삼는다.

최근 인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자연에 대한 성찰로 확장하고 있는 작가 홍일화의 작업을 이해 하는데 있어 참조할 논의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예술 내부의 담론으로 들어와 오늘날 재현 회화가 지닌 딜레마와 그것의 극복에 관한 매체 미학적 사유 또한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홍 일화의 작품을 이해하는 관객에 있어서나, 이러한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검토할 내용일 것이다. 회화적 실천의 배경에는 튼튼한 이론적 무장 또한 필요하다는 차원에 서 그의 작업이 회화적 실천과 이론이 병행해 나가는 탄탄한 길을 닦아나가길 기대한다.


De la « forêt » de l'inconnu et de l’horreur à la « nature » de la symbiose

Kim Sung-Ho, critique d'art

I. Jusqu’à la forêt Hong Ilhwa, peintre coréen exerçant en France, a jusqu’à présent exploré le sujet de l’être humain à travers des peintures figuratives exprimant diverses formes humaines. Ce sont des thèmes tels que le désir, la consommation, la mode, la société et l'histoire, qui ont été explorés par juxtaposition au mot humain à travers des aplats de couleurs lumineuses et vives combinés à un langage de mimèsis et par un coup de pinceau vif et souple.

Puis il a récemment travaillé sur un nouveau sujet appelé «forêt». Son expérience de séjour et de travail à Gotjawal (곶자왈), sur l'île de Jeju il y a quelque temps, s’est mué en opportunité. Éloigné de sa famille restée en France, son expérience de vie et de travail sur l'île de Jeju, sa confrontation quotidienne avec une forêt profonde isolée, a été la force motrice du changement de sujet de son travail. Bien sûr, il ne s’est pas engouffré dans la « forêt » en faisant fi du thème de « l’humain » qu'il explore depuis plus de vingt ans. La nature a toujours été source de réflexion dans la démarche créative de l'artiste, c’était un sujet à explorer en parallèle avec le mot humain, un sujet à explorer un jour, mais le sujet est venu à sa rencontre précipitamment.

On admet généralement que la nature est divisée en « mer, rivière, terre, forêt, animaux et plantes ». En particulier, c'est une nature nommée « forêt » que Hong Ilhwa rencontre chaque jour à Gotjawal. Les forêts sont la nature englobant les rivières, les terres, les animaux et les plantes.

La forêt est une métaphore de la nature, y compris tous les éléments détaillés de la nature. Pour Hong Ilhwa, la «forêt» devient le dispositif du synecdoque (제유법 提喩), par laquelle elle signifie la nature. La synecdoque est une métonymie particulière pour laquelle la relation entre le terme donné et le terme évoqué constitue une inclusion ou une dépendance matérielle ou conceptuelle. On nomme la partie pour signifier le tout. Un exemple typique est l'analogie des cheveux gris pour évoquer les personnes âgées ou le pain pour référer à la nourriture en général.

La « forêt » qui représente la nature n’était qu’un objet de perception universel et inertiel pour l’artiste Hong Ilhwa et ce jusqu'à sa rencontre avec Gotjawal. Pour lui, la « forêt » n'était qu'un « objet de petites expériences » lors des pique-niques, des promenades et la pratique de l'alpinisme, c’était aussi « un objet qu'il avait expérimenté indirectement » à travers des programmes télévisuels. Pour l’artiste, la forêt et la nature étaient considérées comme un refuge face à la ville, un lieu à la recherche d'un moment de repos face à la civilisation, un lieu de réconfort pour soigner l'esprit et le corps fatigués, et un lieu de méditation qui permet de prendre du recul face à la vie férocement compétitive de l’homme moderne.

Cependant, un changement est survenu lorsque le peintre Hong Ilhwa est entré en contact directe avec la « forêt » de Gotjawal. Nous le savons. L'expérience directe change fondamentalement notre perception. Jusqu'à présent, les pensées de Hong Ilhwa sur «la forêt et la nature », qu’il n’avait entraperçue par inadvertance ou à distance, changent radicalement alors qu'il fait face à un lieu spécial dénommé « Gotjawal » à Jeju. Quel est donc ce changement? Ce « quelque chose » s’est opéré par l’imbrication avec ce lieu dénommé « Gotjawal ».

Gotjawal, un mot composé de « got » signifiant forêt et « jawal » signifiant buissonnant, est un dialecte de Jeju qui fait référence à la forêt indigène de la nature. Ici, « les plantes tropicales de la limite nord et les 2 plantes de la limite sud coexistent ». Voyez ! Les contreforts et les rochers inégaux, les vignes végétales qui poussent autour de l'endroit et les animaux sauvages qui la traversent font de la forêt dénommé Gotjawal la scène de la vie.

Si on devait reformuler en langage mathématique le réexamen de la nature effectué par l'artiste Hong Ilhwa à l’aune de son expérience de la forêt, les humains seraient l’ensemble de définition (정의역 定義域), la nature l’ensemble d'arrivée (공역 共域) et les forêts l’image d'une application (치역 値域). Si cela est exprimé en fonction mathématique, ce serait « f: humain → nature ». La forêt est l’image d’une application qui fait partie intégrante de la nature qui est l’ensemble d’arrivée. Même si une partie ne peut pas exprimer le tout, le tout transmet intensément une partie de tout. Qu'est-ce que la « nature » représentée par la forêt a-t-elle transmis si fortement à l'artiste Hong Ilhwa?

II. Forêt de l'inconnu et de l’horreur
Jetons un coup d'oeil au travail de l'artiste Hong Ilhwa sur Gotjawal. À l'instar des peintures murales de la série des nénuphars de Claude Monet installées en permanence au Musée de l'Orangerie, sept grandes toiles forment un tout, créant un paysage recouvrant les murs de la salle d'exposition. La forêt de Gotjawal semble avoir été transférée telle quelle dans cet espace du cube blanc chargé de fraîcheur d’où la couleur verte semble déborder. Son paysage de Gotjawal, qui semble laisser entrapercevoir un focus chaotique (난초점 亂焦點) à travers une fenêtre en verre recouverte de gouttelettes d'eau, est un mystère en soi. Au-dessus de ce paysage verdoyant ressemblant à des ondulations gorgées de rosée ou de brins d’herbes chargés de scintillements, les arbres au tronc noir se tordent et semblent traverser la toile.

Dans ses peintures de paysage persistent le pointillisme observé dans les peintures de portrait, mais on observe également une différence notable. On remarque les coups de pinceau plus effrénés qui répandent la peinture et la décomposent. En effet, contrairement aux peintures de portraits qui se concentraient sur des parties accrocheuses et des expressions faciales telles que les yeux, le nez et la bouche, ses récentes peintures de paysage ont abandonné la mise au point particulièrement remarquable et englobent le paysage avec des multifocaux ou un focus chaotique. Dans ses peintures de paysages, comme dans la vraie nature, rien n'est supérieur ou spécial à autre chose. Seuls les fleurs, les arbres et les brins d'herbe sont des voisins proches, créant une image harmonieuse.

Observez la peinture de paysage avec des fleurs sauvages en pleine floraison qui remplissant la toile. La toile regorge «d'images de fleurs» qui semblent avoir été photographiées en gros plan (接 寫) dans le but de remplir le viseur. Dans ces oeuvres, la «parallaxe du viseur» (시차 視差), que l'on peut appeler «la différence entre l'image capturée par l'objectif et l'image capturée par le viseur», est si étroite qu’il n'y a pas de place pour un «être sûr de soi». Dans un tel monde, il ne peut y avoir de plus belles fleurs que toute autre chose. C'est parce que c'est un monde où chacun est en harmonie. Cependant, dans ses peintures de paysages, on trouve également des choses au-delà du domaine de l'harmonie idéale. C'est le domaine de l’inconnu (미지 未知) qui reste comme une image abstraite. Dans ce domaine, il existe un « paysage ambigu ou surréaliste » qui ne peut être spécifié ou spécifique. Parfois ambigus et abstraits, ou bien étranges, des paysages surréalistes, avec la ligne horizontale comme axe, se situent dans la profondeur (심층 深層) de l'oeuvre de Hong Ilhwa. En d'autres termes, si le haut de la toile est le domaine de « connaissance dans la réalité » (현실 속 지 知), alors le bas de la toile est un «domaine inconnu abstrait ou surréaliste».

Observons l’oeuvre. Un oiseau aux longues pattes ressemblant à un flamant rose ou à une grue se dresse au bord de l'eau qui semble être un lac dans la forêt, et l'image de cet oiseau est représentée à la surface du lac. L'identité même de l'oiseau, qui semble être un flamant rose dans le monde réel, n'est pas très claire, mais l'apparence du reflet à la surface de l’eau n'est qu'une masse rose ambiguë. Observons d'autres oeuvres. Sur la toile, où l'horizon semble séparer la forêt et le lac, une masse obscure de formes comme de la fumée flotte, projetant une image pâle reflétée comme une ombre sur la surface de l'eau en contrebas. Dans certaines oeuvres, une forme d'éventail qui ressemble à un champignon coloré se trouve à la surface de l'eau, et l'image inversée réfléchie en dessous forme une paire, créant une forme de vie circulaire indéterminée.

À ces oeuvres, l'artiste donne le nom de « Paysage temporaire ». Ce titre qui a été créé en collant délibérément deux mots pour ressembler à un « nom propre », exprime que le paysage naturel auquel il est confronté est une existence qui continue de changer sans cesse. Dans les oeuvres ci-dessus, même le domaine de « connaissance dans la réalité » au-dessus de la surface de l'eau est ambiguë ou difficile à préciser, mais le domaine de « l’inconnu dans l’irréalité » sous la surface de l'eau est parfait. Les deux sont des espaces de mouvement qui soutiennent des cycles naturels et des changements temporaires. S'il est différent, le domaine du « connaissance dans la réalité » peut mesurer l'ordre de circulation et de changement dans une certaine mesure, mais dans le domaine de « l'inconnu dans l’irréalité ou la surréalité », il est difficile de mesurer le domaine du changement.

Comme ce fut le cas pour Hong Ilhwa face à Gotjawal, « La forêt irréaliste dans la réalité » est un « paysage temporaire » qui nous est présenté avec une esthétique chargée de contraste. La forêt dans la réalité de Gotjawal maximise le domaine de l’inconnu car elle contient à la fois les domaines de cette réalité et du surréalisme. Nous le savons. Cela signifie que ce domaine inconnu est lié à l’horreur. Dans la forêt de Gotjawal, il n’y a de chemins que de pierres et de rochers recouverts de fleurs et de plantes sauvages, qui nous conduisent dans une « horreur inconnue » de jour comme de nuit. Horreur de la forêt! Ce n'est pas aussi simple et clair que le confort de la «nature artificielle», que nous appelons jardin (정원 庭園) ou parc (공원 公園). Contrairement à l'apparence du parc, qui est divisé et organisé en fleurs, pelouses et lacs, les forêts comme celle de Gotjawal ne fournissent qu'un chemin pour l’état sauvage et embrassent la lumière et l'ombre d’un seul tenant.

Il n'y a pas de place pour les humains dans cette forêt sombre dénommée Gotjawal où tout semble sens dessus dessous. C'est parce que tout a été réglé comme un espace réservé aux «êtres non humains». Gotjawal est un espace pour les écureuils, les chevreuils et les animaux volants, ainsi que pour toutes les plantes de la forêt. C’est en premier lieu un espace qui n’est pas destiné pour les humains. Il serait naturel pour les humains de ressentir « l’aliénation, l’inconnu et l’inquiétante horreur » dans cet espace de l’inconnu.

III. Nature de la symbiose
La « forêt » qui était autrefois avec les humains est-elle issue du monde mythique originel, créant désormais son propre monde séparé des humains? Pas exactement. C'est parce que la séparation entre les humains et la nature n'est pas l'isolement volontaire de la « forêt », mais le résultat de l'objectivation de la forêt par l'homme à travers la civilisation moderne. C'est aussi la « civilisation humaine », visant « la commodité et le confort humains », et établissant les êtres humains comme sujet du monde, qui est à l'origine, en fin de compte, de la solidification du système de séparation éternelle et de divorce d'avec la nature, le berceau dans laquelle appartenait le sujet humain. En d'autres termes, on peut dire que «la civilisation causée par le désir humain » a fini par conquérir et contenir la nature, notifiant à la nature de la séparation et conduisant au divorce.

Alors, comment les humains et la nature peuvent-ils parvenir à une symbiose en cette ère de séparation? Cela est possible grâce à la « méthode de réversibilité qui fait de la nature le sujet » que les humains ont objectivé. 4 En d'autres termes, en invitant la nature comme protagoniste de l'écosystème, on pratique constamment « la symbiose avec les humains ». Ici, la symbiose est un terme biologique, et plutôt que le « commensalisme », où une seule partie bénéficie et l'autre partie n'a ni bénéfice ni dommage, on vise un « mutualisme » dont les deux parties tirent des bénéfices. Ce point de vue, chez Merleau-Ponty, nous rappelle que l'homme et la nature sont « l’existence d'une interaction sans distinction entre sujet et objet ».

Comment cette conscience du thème de la symbiose s'exprime-t-elle en détail dans l'oeuvre de l'artiste Hong Ilhwa? Tout d'abord, on peut dire que la forêt hybride de Gotjawal est basée sur ce thème de la symbiose. Le fait que les herbes, les fleurs, les arbres, les insectes, les animaux et les rochers sont entrelacés comme une seule entité, est une caractéristique typique de la forêt sauvage. De plus, malgré que les humains n'apparaissent pas dans ses oeuvres représentant les paysages de la forêt, « La nature dans la réalité » comme «la faune et la flore, les rivières, les lacs et la terre » au-dessus de l'horizon et «la nature imaginaire dans l’irréalité » en dessous de l'horizon forment un couple, suggérant l'apparition d'humains. En d'autres termes, en plaçant les humains, sujet de l'imagination, dans l'espace extérieur de la toile (hwamyeon화면 畫面), il les fait interagir avec l'espace intérieur de la toile.

Il est intéressant de noter que ce phénomène (l'apparition d'un sujet humain en dehors de la toile) est lié à la couleur artificielle du « rose » qui est « placée sur la toile comme un concept abstrait » sous une forme ambiguë non identifiée. Avec un fond sombre, le « non-objet » rose situé au centre ou autour de l'oeuvre est lié à l'imaginaire du sujet humain et rompt avec la perception uniforme et inertielle. « Le sujet humain n'apparaît pas sous une forme spécifique sur la toile, mais le rose sur la toile implique aisément l'identité humaine.

Réfléchissons. Le rose, qui se dit « bunhong » (분홍 粉紅) en coréen, fait référence au «rouge pâle et doux». En d'autres termes, c'est un rouge pâle devenu achromatique grâce à un mélange de blanc. En ce sens, le rose est «l'intersection entre le rouge et le blanc». Le rose se trouve parfois dans la nature, mais ce n'est pas une couleur courante dans la nature. En un mot, c'est une couleur artificielle qui n'est pas naturelle, c'est une couleur créée par les humains, et on peut l'appeler «couleur humaine». Jusqu’à présent, du point de vue de la sociologie, le rose a joué le rôle de signe conventionnel de la « couleur féminine ». L'artiste Hong Ilhwa ajoute une réflexion critique sur nos stéréotypes tels que « bleu pour les garçons et rose pour les filles » et nos perceptions inertielles contenues dans ces couleurs. En d'autres termes, il prêche que le rose était associé au pouvoir au Moyen Âge et à la Renaissance, et jusqu'au XVIIIème siècle, il était associé aux hommes, et qu'il n'a été nommé qu'au XIXème siècle. Ce code sociologique est profondément ancré dans l'histoire du concept de la couleur rose, qui est aujourd'hui considéré comme la couleur des femmes.

La couleur artificielle rose, qui était souvent utilisée dans la « série de schémas », qui traite des figures, a été nouvellement établie dans les récentes peintures de paysage de Hong Ilhwa, rappelant la signification de la symbiose entre l'homme et la nature. Sur la toile, l'existence « d’humains invisibles » est explorée avec une couleur artificielle de rose vif aux formes abstraites et ambiguës. Sa dernière oeuvre, qui explore la forêt sous forme humaine, passe de la forêt de l'inconnu et de l’horreur à la nature de la symbiose. Plus précisément, divers thèmes auxquels les humains sont confrontés, tels que le désir, la consommation, la mode, la société et l'histoire, sont maintenant transférés dans une nature largement divisée en forêts. S'il est impossible de prédire comment évoluera le travail de l’artiste, il ne fait aucun doute que d’une orientation centrée sur l’humain, le travail de l’artiste évolue dans le sens de la relativisation et de la diversification de la conscience du sujet.

IV. épilogue
Les ouvrages de référence pour compléter l'interprétation et la critique des oeuvres de Hong Ilhwa sont généralement des théories sur l'ontologie de la symbiose avec la nature et l'écologie de la symbiose auxquelles les humains sont confrontés.

Tout d'abord, plutôt que de considérer la nature comme un objet d’observation, il s'agit de reconnaître la nature comme un nouveau sujet vis-à-vis de l'homme. De ce point de vue, les propos de Cézanne, « Le paysage se pense en moi et je suis sa conscience.” », cités par Merleau-Ponty sont essentiels. Cette citation qui semble évoquer le renversement du sujet humain et de l'objet nature, nous apprend qu'en fait, le sujet et l'objet sont dans une relation dynamique qui est interchangeable depuis le début. Merleau-Ponty a également écrit qu’«Être corps, c'est être noué à un certain monde [...] notre corps n'est pas d'abord dans l'espace : il est à l'espace. ». Il exprime ainsi que le sujet et l'objet ou l'humain et la nature existent dans l'interaction.

Ensuite viennent les théories sur l'ontologie du visible et de l'invisible de la nature. Selon Merleau-Ponty, dans le monde visible, "au sens strict, il existe une couche d’invisible qui permet au visible d’exister en tant qu’absence spécifique. » En d'autres termes, il devient possible de comprendre le déficit causé par le visible lorsque l'on comprend le monde invisible. L’invisible est plus primitif que les résidus exclus par le visible. Pour Merleau-Ponty, l’essence de l'invisible est nommé « profondeur ». Cette « profondeur », qui est « le plus profond » et « l’endroit profond », est un moyen par lequel les choses peuvent rester pures, c'est-à-dire que les choses peuvent rester comme des choses. Sans profondeur, il n'y aurait ni monde ni existence. Selon Merleau-Ponty, pour que le sujet saisisse la « profondeur » d'un objet, il « doit sortir de sa position, renoncer à sa vision du monde et se penser comme partout à la fois ». Selon notre approche, c'est aussi le point de vue du sujet humain regardant la nature. En d'autres termes, un effort est nécessaire pour rompre avec la perception inertielle de l'apparence de la nature superficielle et pour voir avec des « yeux nouveaux » la nature et ce qui est invisible de son extérieur.

Un autre raisonnement concerne l'écologie de la nature. Comme le révèle l'écologiste Carolyn Merchant, l'étude de la nature passe aujourd'hui de « l’écologie profonde (Deep ecology) et de l'écologie spirituelle (Spiritual ecology) à l'écologie sociale (Social ecology) ». Il est également vrai que l'écologie profonde et la psychoécologie, ancrées dans l'anthropocentrisme et le rationalisme, sont les principaux responsables de la destruction de la nature et de l’environnement. En s’opposant ou en échappant à ces concepts, et tout en se concentrant sur la « direction réversible » on se positionne pour la nature et l'environnement pour sa préservation et sa restauration. Contrairement à ces concepts, l'écologie sociale est une écologie qui maintient une « direction irréversible » en prenant l'anthropocentrisme et le rationalisme de manière équilibrée, en cherchant une méthode pour « récupérer l’écologie fondamentale » dans la société complexe d’aujourd’hui. L'écologie souhaitée aujourd'hui concerne cette direction irréversible de la nature. Aujourd'hui, l'écologie se concentre sur la rencontre interactive entre l'homme et la nature et la « durabilité » du futur.

Serait-ce le seul débat auquel se référer pour comprendre le travail de l'artiste Hong Ilhwa, qui est récemment passé d'une recherche sur les humains à une réflexion sur la nature ? Il sera également nécessaire d'entrer dans le débat de la réflexion esthétique des arts et des médias sur le dilemme de la peinture figurative d'aujourd'hui et son dépassement. Ceci sera à examiner selon le point de vue de l'artiste qui se consacre à ce travail et également pour le public qui comprend le travail de Hong Ilhwa. Dans le contexte d’une nécessité d’un solide acquis théorique dans la pratique picturale, j'espère que son travail ouvrira la voie solide où la pratique picturale et la théorie iront de p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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